본인이 운영하는 사찰의 감포분원이 생기기 이전에 많은 신도들의 요구사항이자 여망은 산중사찰의 건립이었다. ‘우리절도 산중에 분원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일주일에 한번은 꼭 가서 좋은 공기 마시면서 실컷 기도 할 텐데요.’
그런데, 막상 산중사찰이 생기자 신도들의 반응은 시큰둥하였다. 4~5년이 지난 지금도 찾는 이가 적어 감포분원은 썰렁하다. 비단 이런 현상은 우리절의 경우만은 아니다. 산중사찰은 어디를 가 보아도 잘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절은 산중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너무나 굳고 딱딱하다. 전셋집을 인수하여 막 포교활동을 시작하는데 충격적인 일을 당했다. 어린이법회 도중에 3학년짜리 꼬마가 느닷없이 한마디 쏘아 붙였다.
‘중이 산에서 도나 닦지, 절이 뭐 하러 도시까지 나왔어!’ 분위기가 산만하여 좀 조용히 하라고 힐책하였더니 그렇게 반응한 것이다. 참으로 황당하였다. 그것은 그 아이의 생각이기보다 그 부모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배운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생각은 우리불자 모두의 불교에 대한 시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국불교는 스스로 쇠락해 질 수 밖에 없는 자기체면에 걸려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금의 한국불교가 ‘산중 영험주의’의 딜레마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화석화, 박제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백용성스님 같은 대선지식은 1910년에 이미 당시 개성 시내의 교회당을 둘러보시고는 사찰이 산중에서 나오지 않으면 기독교에 뒤질 것이라고 단언 하셨다.
지금이 과연 그렇지 않은가. 최근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 불교인구가 22.8%인 반면에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하여 30%에 육박하고 있다. 1600년 한국불교는 200년 밖에 되지 않는 서양 종교에 사정없이 밀리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지경이 되었을까? 도심사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도심사찰이 없으면 왜 망할 수밖에 없는가?
먼저는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청년 법회를 열 수 없다. 즉, 미래희망이 사라진다. 그리고 현대인들의 생활권이 다 도심인데 산중까지 가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왜 불교가 이렇게 기력을 잃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시골인구의 90%가 도시로 유입됐다. 사람이 가는 곳에 사찰이 따라가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사람은 가고 절만 덩그렇게 남아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중생 있는 곳에 부처 있다’는 말씀을 따라 부처님을 이고지고 그 중생들을 따라 붙여야 옳았다. 석가모니부처님 당시, 모든 절은 도시에 있었다. 최초의 사찰 죽림정사는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에, 부처님께서 24안거를 지낸 기원정사는 코살라국의 수도 사위성에 있었다. 불교인은 부처님을 모델로 삼을 일인데 절터를 잡는 것도 그리 해야 되리라.
신도시가 생길 때 마다 불하되는 종교부지는 다른 종교에서 싹쓸이 해 버린다. 우리불교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영남불교대학 관음사가 28만명의 칠곡 신도시에서 따낸 종교부지는 기독교의 10분의 1도 안된다. 칠곡분원의 포교가 대단히 힘든 이유다. 칠곡은 이미 기독교에게 모든 분위기를 내주었다.
한국불교가 다시 살아나려면 도심에 사찰을 세워야 한다. 백장스님의 불매인과(不昧因果)를 자각하지 못하고 끝내 불락인과(不落因果)를 고집한다면 한국불교는 희망이 없다. 영남불교대학 관음사가 이렇게 성장하고 있는 것은 도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우학스님/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회주 /2006년 8월26일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