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단자정센터는 16일(화) 오후 7시 만해NGO교육센터(장충동 우리함께빌딩)에서 특별강연으로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이찬수 교수를 초빙하여 ‘종립학교와 학생인권’을 주제로 특강법회를 개최했다. 이날 열린 특별강연에서 이찬수 교수는 대학구조가 시장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면서 학생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교육은 사업이 돼버렸다’고 했다. 또한 돈을 내고 혼나는 이상한 주체가 학생이며, 학생들이 자기 권리를 못 찾는 곳이 대학이라고 꼬집었다. 강연 후 질의응답 시간에 김건중 전 동국대총학생회장의 무기정학 사유 중 건학이념 훼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찬수 교수는 건학이념을 어떻게 따질 수 있으며, “오늘날 대학이 왜 필요한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육의 주체와 대상인 인간이란 무엇인지 다시 새롭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람을 중심에 두지 않는, 남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적 가르침은 더 이상 종교적 가르침이라 하기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교단자정센터는 교단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부대중에 의한 공동체성을 지키기 위해 개혁방안을 연구하고, 부정부패 예방과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기관으로 매월 셋째 주 화요일에 정기법회와 함께 특별강연, 토론회 등을 개최하고 있다. 다음은 이찬수 교수의 특강 전문이다. 학교는 왜 시끄러운가 이찬수(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 1. 전 국민의 ‘올인’ 사전에서는 ‘대학’(大學)을 “고등교육을 베푸는 교육 기관”이라 규정하고 있다. “국가와 인류 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술 이론과 응용 방법을 교수하고 연구하며, 지도적 인격을 도야한다”고도 해설한다. 대번에 알 수 있겠듯이, 이러한 사전 풀이는 국가 중심적 정의이다. 요즈음 누가 국가와 인류 사회를 위해 대학에 진학하는가. 실제로는 누구든 자신을 위해 대학에 간다. 물론 사회사적으로 보건대 대학을 비롯한 학교 교육은 근대 문화로의 변화를 선도하는 계몽적 역할을 수행해온 것은 사실이다. 여전히 그런 측면이 있다. 교육은 개인과 집안의 신분을 상승시켜 주기도 했고, 산업 현장과 연결되면서 한국 경제발전의 기초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교육이라는 보이지 않는 투자를 통해 격변하는 시대를 경험하며 헤쳐 온 기성세대는, 교육으로 성공한 이든 교육의 기회를 놓쳐 안타까워하는 이든, 한결 같이 교육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 정점에 대학이 있다. 온 사회가 대학에 ‘올인’하다시피 하는 것은, 사전적 정의와는 달리, 국가나 사회가 아니라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이다. 자신을 위해 투자해야 할 일순위에 교육을 두고서, 거의 전 국민이 교육에 몰입해왔다. 그 결과 대학에 진학하려는 이들의 일차적 의도와는 달리 대학이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은 사실상 개인의 성장을 위한 투자였다. 개인의 욕망을 전제한 개인의 전략적 투자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이제는 정책으로는 풀 수 없는 난국의 상황에 이르렀다. 교육이 제일 큰 병에 들었다면서 아무도 해결할 수도 없는 난망한 형편에 처하고 말았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라”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의 교훈마따나, 전 국민이 거의 광적으로 교육에 ‘올인’하며 생긴 문제는, 분명 난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육으로 풀 수밖에 없는 교육적 과제인 것도 분명하다. 대학이란 무엇이며, 오늘의 우리의 대학은 어떤 형편에 처해있는 것일까. 대학은 과연 큰[大] 배움[學]의 장소인가. 2. 조직과 재산 대학은 본래 교수 또는 학습자들의 모임 또는 조직이었으나, 1908년 ‘사립학교령’을 설치해 일정 수준의 재산이 있어야 학교 설립이 가능하도록 한 뒤에는 설립자가 교수를 고용하고 학생을 선발하는 흐름이 생겼다. ‘불온한’ 이들의 대학 설립을 제한하려는 전략적 의도에서였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사립대학은 그 뒤 시설로서의 물적 요소와 단체로서의 인적 요소를 함께 가지게 되었다. 국공립 대학(국가나 지자체 같은 공법인이 설립자가 되어 시설을 설치, 운영한다)과는 달리, 사립대학은 재산을 근거로 구성된 재단법인이 시설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주체로 부각된다. 법인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학교의 운영 주체이자 소유자로 자리매김해가면서 교수를 고용하고 학생을 선발해 교육 사업을 벌이는 흐름이 커져간 것이다. 이 점만 놓고 보면 법인 이사 내지는 경영자가 교수나 학생에 대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대학은 그 의미와 속성상 ‘시설’만이 아니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조직’이기도 하다. 대학은 교사와 학습자의 만남을 위한 조직적 중개자로서의 측면도 크다. ‘조직’이란 개별적으로 만나게 되는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결합시켜 능률과 합리화를 도모하는 활동 공간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분명히 하나의 ‘조직’이다. 당연히 조직 구성원 전체가 대학의 주체이기도 하다. 시설 투자를 한 설립자가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도, 학문의 보급자인 전체 교수가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도, 시설 운영의 근간인 등록금을 내는 학생이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도 다 정당하다. 때론 이 세 주체들이 충돌하곤 한다. 그러나 충돌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학교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영자, 교수, 학생이 어떻든 대학 구성원으로서의 주체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대학 교수들은 자신을 단순 피고용자로 여겨 자신을 선발한 경영자의 경영 방식이나 평가 기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때로는 비리도 눈감아주며 스스로 그에 종속되고 마는 경우가 더 많다. 그저 월급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냉소적인 회피가 주류를 이룬다. 학생도 별 주체의식 없이 졸업장이라는 자격증만 따면 그만이라는 식의 소극적 처신에 머문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특별히 사립대학의 온갖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주로 여기에 있다. 3. 사적인 영역으로의 도피, 공공성의 약화 오늘날 사립대학의 문제는 대학 구성원이 자기주장을 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으로 도피해 개인의 안일만을 보전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대학의 주체들이 교육의 공공성에 눈감으면서 소유 의식이 강한 설립자나 경영자의 욕망의 크기에 비례해 문제도 그만큼 커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교육법상의 행위 주체와 재산상의 행위 등 사법상의 행위 주체를 분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교육철학과는 모순되게도 대학을 설립자의 재산처럼 여기는 사례가 빈번해진다. 대학을 수익단체 내지 영리법인처럼 만들려는 시도들이 신자유주의 생존경쟁 체제 속에서 정당화된다. 그러면 그럴수록 대학이 점점 더 사설학원 수준으로 전락하지만, 학교 경영자는 늘 이러한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대학을 영리단체로 몰아간다. 대학에 대한 투자도 수익을 내기 위한 전략일 때가 더 많다. 그나마 교육으로 재투자되기보다는 대학은 위기상황에 처할수록 외적 몸집 불리기로 대응하려 한다. 그에 반비례해 외적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대시키지만 교육의 질적 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은 설립자 내지 경영자가 대학을 ‘자산’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당연한 현상이자 결과이다. 설립자가 경영까지 하게 되면, 그에게 대학은 자신의 자산에 가까워진다. 개인적 자산처럼 여기기에 시설에는 투자할지언정 구성원들의 질적 성장에는 투자하지 않으려 한다. 교수나 직원 월급은 가능한 동결하거나 깎으려 하지만 학생들 등록금은 가능한 올리려 한다. 투자를 하더라도 가능한 대로 시설 분야에 투자를 해두어야 학교의 경제적 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립학교의 경우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만일 학교를 매매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 이런 상황을 일부러 바라는 설립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 시설을 자신의 재산으로 되찾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4. 대학의 부동산 실제로 대학의 실체는 구체적 유형물로서의 건물과 토지에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는데, 토지의 항구성이 대학의 존속을 담보한다. 기업은 자산보다 채무가 많을 수도 있고 주주와 같은 사람 또는 처분 가능한 재산을 핵심으로 하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변동의 폭이 큰데 비해, 대학은 설립 당초 또는 그 이후의 조치에 의해 처분 불가능하도록 대학 기본재산으로 정해진 것들을 근거로 한다. 그런 점에서 기업이 30~40년을 못 넘기고 사라져도 대학이 더 오래 유지될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 이처럼 대학은 부동산을 기본 자산으로 하여 설립된다. 한국의 대다수 대학들이 작게는 수천 평에서 많게는 수백만평까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4년제 대학의 토지를 합하면 1억3천만 평 가량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대부분 지리적으로 요지에 자리 잡고 있거나, 대학이 자리 잡으면 지리적으로 요지가 된다. 대학 보유 땅값을 시장 가격으로 하면 수백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한국의 대학은 명실 공히 최대의 대지주 집단인 것이다. 대학들이 보유한 부동산은 교육적 가치가 없지는 않겠지만, 경제적 기여는 거의 없다. 산학협력을 통해 대학의 부동산이 경제적 차원에서도 활용될 필요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일단 정부에서는 대학의 부동산을 학생 교육에 제한하고 있고, 대학은 그렇다는 핑계로 부동산을 독점 소유하면서, 종종 투기 목적으로 이용하고 확장하곤 한다. 재산불리기를 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부작용도 생겨난다. 가장 큰 부작용은 앞에서 본대로 대학의 재산이 교육으로 재투자되기보다는 그저 몸집 불리기 내지 경영자 개인의 재산처럼 간주되는 것이다. 교육열이 막강한 사회였던 탓에 대학을 세우기만 하면 돈을 벌 수 있었다. 교육은 정말 사업이 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고려시대 사찰들이 토지를 대규모로 사유화하다가 고려말 경제적 낙후의 중요 계기로 작용했던 것처럼, 재산 부풀리기 수단으로 삼는 대학 부동산 문제는 향후 여러 가지 차원에서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다. 5. 대학과 국가, 그리고 평가 한국의 경우 자체적인 교육 역량이 없던 20세기 전반기, 거의 모든 교육을 사립학교가 감당했다. 사립학교가 설립되면 정부가 운영(교육)을 위한 재정지원도 한다. 여기서 정부와 사립대학의 공생, 부정적으로 말하면 국가의 사립대학 통제가 진행된다. 1995년 5월 31일에 교육개혁안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사립대학 설치를 거의 국가의 통제 아래 두었다. 그러다가 대통령령에 따라, 대학, 특히 교사(校舍), 교지(校地), 교원(敎員), 수익용 기본재산(財産)이라는 네 가지 기준만 충족시키면 사립대학 설립을 인가하는 ‘준칙주의’로 전환했다. 이로써 사립대학 설립이 국가의 직접 통제로부터 다소 벗어나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대학을 설립하면서 대학의 질이 떨어지게 된 것은 불행이다. 그리고 그 이후 대학 인력이 과다 배출되면서 2014년 기준으로 고교 졸업생의 70% 이상(2009년에는 78%)이 대학을 진학하는 ‘비정상적’ 사회가 되었다.(OECD평균 39%) 그것이 새로운 사회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실적을 매개로 맺어지는 교수 연봉제 내지는 업적평가 시스템은 학문적 자유를 보이지 않게 억압한다. 현재 대학 교수의 연구 역량 평가는 대부분 ‘한국연구재단’에 등재된 학술지 논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SCI, SSCI, ANHCI 등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지들에 게재하면 훨씬 더 우대받는다. 이를 위해 한국연구재단은 적절한 연구 주제를 선정해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한다. 그러다보니, 교수 등 각종 박사급 연구자들은 ‘필사적으로’ 연구비 수혜에 매진한다. 이 기초에는 이른바 ‘평가’(assessment)가 있다. 교육부는 교육정책을 펼쳐가는 수단으로 대학에 다양한 명목의 연구비를 지급한다. 대학은 수익사업의 일환으로 교육부의 연구비에 목을 맨다. 제한된 재산에 허덕이고 있는 대학으로서는 교육부의 연구비가 달콤하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학교에 대한 ‘평가’가 언제나 기초에 놓여있다. 무디스 같은 신용평가회사는 하버드 같은 대학들을 일반 기업 다루듯이 평가한다. 신용평가회사에게 대학은 학위라는 상품의 품질관리와 소비자인 학생들의 만족도를 높임으로써 존재하는 일종의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학에서조차 교육보다는 행정을 중시하곤 한다. 그것이 신용평가회사가 살아가는 전략이기도 하다. 평가회사는 끝없이 ‘과학적’ 평가 기준을 마련하고, 대학은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시간과 자원을 투자한다. 대학 내에서도 교수, 학생들 간 평가가 서로에게 최대의 무기로 작동하고 있다. ‘평가’는 교육을 인격과 깨달음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술적 차원에서 양적으로 관리하는 일종의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은 대학을 기업으로, 교수를 생산관리직 일꾼으로, 학생을 소비자로 인식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대학이라는 시설과 조직을 전형적으로 양적 자본의 논리 안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평가의 척도는 효율성이다. 아울러 대학은 아무리 특정 목적에 따라 설립된 사립학교이라 해도 교육부의 공적 통제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간다. 특히 근대 한국에서 대학은 성균관 같은 유교적 모델, 선교사들의 미국 칼리지 모델, 일본의 제국대학 모델, 민족자본의 사립대학 모델 등으로 출범했지만, 오늘날 이들같 특징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사립학교들이 세워졌다고 해도, 현재는 한 가지 모델로 통합되어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이다. 게다가 교육부의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겪는 사이에 연구자는 자신의 현재 역사를 공동체의 기억과 과거의 지혜를 통해 살피고 분석하는 지식인이 아닌, 저항의식이 사라진 체제 순응적 존재로 변해간다는 점이다. 학교가 기업이 되어버릴수록 비판적 저항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하게 생각하면 정부의 연구비 지원으로 연구의 주제가 다양해지고, 기초 학문이 든든해지며 박사급 연구자가 경제적인 도움도 받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연구비라는 ‘미끼’로 인한 연구의 순수성은 훼손된다. 순수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보다는 연구비 수혜 가능성이 높은 주제를 인위적으로 만들다시피 한다.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연구이다 보니, 결국 교수 사회는 연구비를 둘러싸고 국가의 정책이나 이념 내지 사회적 분위기에 동조하는 연구를 주로 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을 중심으로 국가에 통제되는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대학 기구 역시 교육부의 통제 안으로 들어간다. 6. 자본과 권력에의 감염 이러한 시스템은 교수의 역량 평가를 결국 연구의 ‘질’의 문제가 아니라 ‘양’의 문제로 만든다. 이전에 비해 몇 배, 몇 십 배나 되는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연구의 주제도 다양해졌지만, 그렇다고 천재적이거나 독창적인 연구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대학에서는 연구 결과도 다분히 양적으로 평가함으로써 교외 연구비 수주를 승진의 주요 기준으로 삼는다. 결국은 연구 질적 내용을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연구비 수주의 규모로 교수의 능력을 평가하는 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대학에서 교수들의 사회봉사 영역에 대한 평가도 정부 기관에 참여하는 점수와 시민단체에 참여하는 점수는 차등적으로 부여한다. 정부 기관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활동 점수는 많은 데 비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활동 점수는 낮다. 학문적 양심을 정부 이념이나 정책 등과 연결 짓도록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또는 교수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권력 지향적, 자본 지향적, 시장 경쟁적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사회봉사라는 미명 하에 결국 연구와 교육보다 친 자본과 권력형 인간을 양산하며, 교내적으로는 대학 경영자에 종속되는 구조도 공고해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대학의 문제는 다양한 순수 학문의 세계를 자본의 논리에 입각한 무한 경쟁의 장으로 내몰면서 수익구조 개선에 공헌하지 않는 학문은 도태시키는 구조가 공고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은 학생대로 무한 경쟁 속에서 판단의 기준을 오로지 자본의 양에서만 찾게 된다. 질적 지식 보다는 양적 학점이 자본의 크기와 비례할 것이라는 욕망에 지배를 받는다. 이른바 스펙도 안정된 직업과 자본의 확장을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식의 축적이라는 무한한 자원과 가치를 중심으로 모였던 대학 사회가 자본의 축적이라는 욕망 앞에서 줄서기 하는 문화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7. 학문의 비솔직성 이렇게 ‘학교’에서 ‘학문’이 솔직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 연구비를 미끼로 내건 국가적 정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학자 혹은 교사 자신의 학문에 대한 부정직함, 철학의 부재 때문이기도 하다. 그 부정직함은 학문을 학문의 논리가 아닌, 시장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적 흐름에 타협하기 때문이다. 자본과 권력에 타협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원인을 감시하지 못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전술한대로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는 이미 돈의 논리에 휩싸여 있고, 그 돈의 논리라면 ‘종교’도 ‘교육’도 팔아넘길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 탓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본, 산업, 경영의 논리로 ‘영혼’도 팔 수 있는 준비가 학교 안에서도 이루어져 있는 탓이 크다는 말이다. 교육의 문제를 산업과 시장의 논리에 맡겨놓고는 최소한의 산업윤리조차 없이 진행 중인 상황이다. ‘교육’이라는 ‘성스러운’ 타이틀을 걸어놓고는 교육을 산업의 논리로, 그러니까 ‘교육산업’이라는 말로 무한질주 중인 것이다. ‘교육산업’은 어쩌면 군사가 산업화된 것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낳을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이 왜곡된 교육열이 한국 산업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육을 팔아 장사하는 일에 모순을 느끼면서도 자신만 이의를 제기하고 벗어나려하다가 손해 보게 되어 있다는 전반적 분위기 때문에 누구든 교육의 산업적 가속화에 브레이크를 밟기 힘들다. 대안교육, 학생의 인권, 학문적 양심과 자유를 위해 기꺼이 자본의 논리와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선구자들도 있지만, 물론 소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선구적 소수가 결국 사회를 바꿀 것이라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역사는 언제나 창조적 소수의 희생에 대중이 따라가며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부모세대가 자신들이 겪었던 교육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다음 세대를 억압하는 광기의 시대이지만, 그 물줄기를 돌려보려는 창조적 소수자의 노력이 결국은 새로운 희망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만은 지켜가야 할 일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점과 욕망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현장이 교육임에도 불구하고, 이 난관을 풀어갈 해결의 열쇠는 역설적이게도 교육이 쥐고 있다고 말할 도리밖에 없다. 교육이 풀어주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무지’이다. 개명한 세상 같으면서도 실상 교육만큼은 여전히 집단적 무지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니, 선생이라고 해서 이러한 무지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있는지 자신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 8. 무지와 폭력을 넘어, 종교교육 이 때 떠올리게 되는 표현 하나가 있는데, 한나 아렌트가 쓴 재판 보고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달린 부제이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유대인 철학자 아렌트는 나치 치하 유대인 대학살의 주범이라 할 수 있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참관하면서 그런 끔찍한 일을 주도했던 이가 어떻게 그토록 죄의식 없는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놀랐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규정했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자기 일에 각별히 근면하고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것을 전체주의적 분위기에 휩쓸리던 데서 벗어나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탓이라고 풀기도 한다. 교육학에 적용하면, 기성 흐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을 ‘탄생’시키는 ‘시작능력’의 배양이야말로 아렌트 사상에 근거한 교육의 목적이기도 하다고 할 것이다. 도대체 오늘날 대학은 왜 필요한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보다 그 속에서 교육의 주체와 대상인 인간이란 무엇인지 다시 새롭게 물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의 경우도 전형적으로 여기에 해당한다. 사람을 중심에 두지 않는, 남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적 가르침은 더 이상 종교적 가르침이라 하기 곤란하다. 가령 나의 입장을 전하고자 한다면 남의 입장을 존중해야만 하는 것이다. 선교도 일방 통행식 선교가 아니라 내가 말하고자 할 때 남에게서 들을 자세를 전제하는 양방 통행식이어야 한다. 한 마디로 ‘상호 선교’인 것이다. 상대방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서 나의 자유를 주장할 수 없기도 마찬가지인 까닭에, 나의 개성, 인권을 존중받으려면, 남의 개성과 인권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라는 것 역시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서 고고하게 존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어떤 제도가 체계가 아니다. 타자를 긍정하고, 이웃을 살리는 행위 자체가 종교의 핵심으로 오늘날 이해되어가고 있는 현실의 한 복판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종교는 어떤 제도나 교리의 차원으로만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며, 참으로 자신을 비워 이웃을 담아내는, 이웃 존중, 생명 회복의 행위 자체이다. 이런 입장에 충실할 때 인간이 참으로 인간의 자리에 서게 되고, 종교적 진리가 종교적 진리로 선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특히 이러한 가르침이 실행되어야 할 학교 안에서조차 이러한 종교 교육적 원리와 반대되는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적인 이유를 꼽자면, 전술했듯이, 학문의 자유, 건전한 지성을 침해하는 세력에 대한 견제장치가 결여된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견제 장치는 단순히 제도의 유무 문제가 아니다. 제도도 사람이 운영하는 이상, 운영하는 사람의 관심 속에서만 효력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도가 있어도 적절히 운영하지 않거나 방조하면 없느니만 못하다. 특히 학교에서의 학문과 사상의 자유와 관련하여 제도의 유무보다 더 큰 문제는 이른바 선생들의 몰양심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웃에서 벌어진 사건을 외면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건을 정당화시켜주는 반교육적 혹은 반학문적 모순을 스스로 범하는 것이다. 종교적 배타주의 자체도 큰 문제이지만, 이웃에 대한 무관심, 동료의식의 실종, 소극적 개인주의 의식의 확대 등등도 적극적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피히테가 학자의 본분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서 도덕적으로 가장 선한 사람이어야 하며” 그 학자의 사명은 “보편적으로 인류의 현실적 진보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고 이러한 진보를 항구적으로 촉진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는데, 지극히 평범한 규정이야말로 대학에서 가르치는 이들이 견지해야 할 기초가 아닐 수 없다. 9.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인간됨의 기본은 사실 유치원에서 배운 것이면 충분하지만, 그것을 이용해 인간 위에 군림하려는 얄팍한 행동이 인간 본연의 가치가 구체화되어야 할 종교 및 교육의 현장을 이기적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만들고 사회악으로까지 번져가게 만든다. 교육의 현장이 교육답지 못해져가는 이유는, 국가의 교육 정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흐름이 아닌 개인적 자세 안에서 찾아본다면, 그것은 교육자 자신의 철학의 부재 내지 학문에 대한 부정직함 때문이기도 하다. 그 부정직함은 교육과 학문을 교육과 학문의 논리가 아닌 시장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적 흐름에 휩쓸리게 만든다. 금력과 권력에 타협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금력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그리고 그런 이들이 모인 대학일 때 학문의 진정한 자유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학문과 교육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치들과 통한다. 금력이나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청렴한 선생의 불꽃같은 눈이 교육을 교육답게 하고 학교를 정화시키는 견제장치가 되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라기보다는 인문학자의 위기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학문의 부자유는 교육자의 부정직함을 반영한다. 교육의 이름으로 인간적 욕망을 종교의 이름으로 포장하고도 유통되는 상업적 구조의 모순을 벗겨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어떻게든지 내면의 소리에 대해 정직하고 이웃을 배려할 수 있을 때, 학문이 서고 학교도 산다. 그런 학교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