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일곱 학도병 한국전쟁 참전수기] 낙동강 전선 최대 격전지 ‘다부동’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후 50여일만인 8월 중순이었다. 피난을 가기위해 경북 영천을 지날 무렵 헌병의 불심검문을 받았다.
신분증을 보자고 하기에 학생증을 주니까 자기호주머니에 넣고 무조건 따라 오라고 하였다. 헌병을 따라가니 도로에 군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 차를 타라고 하여 탄것이 열입곱 소년병의 탄생이었다. 그 자리에서 곧 바로 입대하게
된것이었다.
차는 전선을 향하여 가다가
군부대가 있는 곳에서 멈추어 섰다. 인솔 병이 차에서 내리라고 하였다. 이 부대에서 헌 군복을 지급 받아 입고 학생모자와 흰
농구화를 신은 그대로 급조된 군인이 되었다. 잠시 후 훈련이 시작 되었다. M-1.소총에 실탄을 장전 해주며 엎드린 채로 앞산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기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총을 쏘니 소리가 엄청나게 컸다. 그 총소리에 고막이 터지는 것 같이
아팠다. 총을 쏘고 난 뒤에 귀는 찡하는 소리만 날뿐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단 한 번 사격 하는 것으로 모든 훈련은 끝이
났다. 나는 그날 저녁 낙동강 전선 최대 격전지로 알려진 ‘다부동’에 투입 되었다. 다음날, 사역병으로 차출되어 인솔 병을 따라
전방 고지에 기관총을 갖다 주고 다시 고지에서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밑에서 마주 올라오던 군인이 나를 보고 “이 새끼 인민군 포로구나” 하며
느닷없이 멱살을 잡고 죽여 버리겠다고 하며 달려들었다. 인솔 병이 “야야! 신병이야!” 하니 그 군인이 그제 서야 “신병이 머 이래” 하며
멱살을 놓아 주어 봉변을 면하였다. 헌 군복을 입고 학생 모자에 흰 농구화를 신고 있는 모습이 인민군 의용군 모습과 닮은꼴이어서
적개심이 끓어올라 한 행동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학생들은 머리를 짧게 깎았었다. 인민군도 머리를 짧게 깎아서 인민군포로로 그 군인이 오인을
했던 것이다. 며칠 후 저녁때 취사를 하던 중에 인민군의 야포 공격을 받았다. 적에게 위치가 노출된 것 같았다. 나는 처음
당하는 일이라 무척 겁이 났다. 고참병이 “낮은 곳에 엎드려”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방천 뚝 밑에 죽은 듯이 엎드렸다. 인민군의 포탄은
계속 날아 왔다. 난 그 포탄이 폭발하면서 일으키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엎드려 있었다. 주위는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일선전투의 첫 경험을 나는
이렇게 호되게 했다. 우리 부대는 영천으로 이동을 했다. 나는 소총분대에 배속되었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야간 행군을 하는데
낙오를 방지하기 위하여 분대장이 우리 몸을 새끼줄로 굴비처럼 엮었다. 너무 어두워서 주위가 잘 보이지 않았다. 어느 지점에 이르니 개짓는 소리가
났다. 부근에 마을이 있는듯했다. 마을을 피하여 가는 길가에서 전화선을 발견하였다. 이 전화선을 본 지휘관이 인민군은 이미
이지점을 통과하였다고 하며 낮은 목소리로 빨리 산으로 올라가라고 명령을 하였다. 모두 산중턱까지 숨을 몰아쉬며 뛰어 올라갔다.
당시 우리 부대는 길잡이로 경찰과 방위군을 데리고 왔다. 지휘관이 그들 가슴에 권총을 겨누며 “너 빨갱이지” 하고 다그쳤다.
그들은 “절대 빨갱이가 아닙니다. 날이 어두워 지척을 분간 할 수 없어서 이렇게 되었으니 살려 주시오” 하고 빌었다. 어린 마음에, 지휘관이
그들을 죽일 것 같아 겁부터 났다. 그들이 퍽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동이 트고 있었다. 지휘관이 산 정상에 올라가서 보고 허튼
짓을 하면 그 자리에서 죽이겠다고 하며 그 두사람을 앞세우고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산 밑에 군인들이 오고가고 하는 것이 보였다. 척후병을 내려
보내 확인 한 결과 아군이란 신호가 와서 우리는 안심하고 내려갔다.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어느 마을 뒤 낮은 언덕에 배치되었다.
우린 마을에서 빌려온 삽과 곡괭이로 개인호를 파고 전투에 태세를 갖췄다. 고참병들이 인민군 탱크가 나타나고 곧 대 공격이 예상 된다고 수근
댔다. 어느 날 새벽녘 갑자기 박격 포탄과 기관총탄이 날아 왔다. 우리 부대가 인민군으로부터 완전히 포위되었다고 한다. 빠져나갈 길은 벼가 자라
있는 논바닥뿐이었다. 지휘관이 후퇴 하라고 소리쳤다. 논바닥으로 후퇴를 하는데 인민군은 좌 우 양쪽 산에서 총알 세례를 퍼부어
댔다. 벼 포기를 헤쳐 가며 포위망을 뚫고 나올 때 여기저기에서 위생병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위생병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논바닥에 발이 빠지고 벼 포기가 몸을 휘감아서 마음만 급하였지 빨리 달려지지 않았다. 숨이 턱 까지 차서 기진맥진 하여 죽을 것만 같았다.
드디어 인민군의 총소리가 좀 멀어진듯했다. 이렇게 인민군의 사격권을 겨우 벗어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관총 부사수는
너무 급하여 자기 생명과 갈은 기관총을 버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사수는 어떻게 되었는지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낮 익은
전우들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당시엔 알 수가 없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배가 몹시 고팠다.
큰길로 나와서 길옆에 있는 집에 들어갔다. 주인은 없고 그릇에 밥이 많이 담겨져 있어서 장독에서 고추장을 퍼 와 비벼서 아침을 먹었다. 아마도
집 주인은 총 소리에 놀라 지어 놓은 밥도 먹지 못하고 급히 피난을 간 것 같았다. 이 전투로 영천시가 인민군에게 함락 당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계급장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권총을 차고 있는 군인이 주위에 있는 군인들을 모아 놓고 내가 지휘하니 따르라고 명령을 하였다.
나는 여기에 끼어서 편성되었으나 어느 부대 소속인지 알 수 없었다. 지휘자의 지시에 무조건 따를 뿐이었다. 비가 억수 같이
내리고 있었다. 영천 탈환 작전이 시작 되었다. 영천에 들어가려면 금호강 다리를 건너야만했다. 다리 입구에서 대령이 권총을 빼들고 겨누며 다리를
건너 공격 하라고 명령을 하였다. 우리가 진격 할 때마다. 인민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쓰러지는 사람도 있고 급하니까 강물로 뛰어내려 떠내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한마디로 생지옥이었다. 나는 내 짧은 생애가 여기서 끝나는 구나 생각했다. 살 운명이었는지, 난 그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무사히 다리를 건넜다. 계속 해서 시가지 작전에 선발대로 투입됐다. 척후병의 임무를 띠고 잔적을 소탕하며 전진 하였다.
굽은 길로 들어서자마자 앞선 척후병 2명이 저격병의 총탄에 연달아 쓰러졌다. 경험이 부족한 나는 어디에서 총탄이 날아오는지 알
수 없었다. 다음은 내 차례 라고 생각되어 우선 부근에 있는 집 안으로 몸을 피했다. 누군가 “부상병을 업어” 하기에 중상을
입은 그 부상병을 업고 후송하기 위하여 뒤로 나왔다. 저격병으로부터 피할 수 있어서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비가 계속 내리는 중에
중심가를 점령하고 강 건너 기차역을 탈환 하는 작전이 시작되었다. 또 금호강 다리를 건너야 했다. 다리위로 적의 총포탄이 사정없이 날아 와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나는 다리 중간에서 강물로 뛰어 내려 물살을 헤치고 강둑으로 나와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부대는 강둑에 포진
하였다. 둑을 넘어 역을 공격 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역 까지 갈 수 있는 길은 벼가 자라있는 논바닥뿐이었다. 이 논바닥을
기어서 전진 하여야만 했다. 논바닥 곳곳에서 적탄을 맞고 위생병을 찾는 처절한 소리가 메아리쳐 들렸다. 두려움이 물밀 듯 밀려
왔다. 인민군이 벼 포기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조준 사격을 하여 희생자가 발생한다고 생각 되었다. 나는 논바닥을 기어 가다가
엎드린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방천 둑으로 후퇴 하라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방천으로 넘어 왔다.
나는 인민군을 향하여 사격을 하다가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엎드린 채 잠이 들고 말았다. 밤낮 없는 전투에 잠을 잘 수 없었고
지칠 때로 지친 몸이었었다. 누군가 엉덩이를 발로 차서 돌아보니 분대장이었다. 자면 죽는다고 하였다. 비가 계속 내리는 중에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역을 탈환하기 위하여 포위망을 좁혀 가는 작전이 계속되었다. 역에서 야간 전투가 시작되었다. 화차 밑을 기어 다니며
숨바꼭질 하듯 전투를 벌였다.
너무
어두워 인민군과 국군을 식별 할 수가 없었다. 머리를 만져서 머리카락이 짧으면 인민군이고 길면 국군으로 판단하였다. 나는 머리카락이 짧아서
인민군과 국군 양쪽으로 부터 적으로 오인 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역 변두리 후미진 풀밭에 엎드린 채로 밤을 새웠다. 아군은 그새 역을 점령
하였다.
이렇게 영천부근을 중심으로 약 20일간의 교전 끝에 영천을 수복하였다. 나는 많은 전투 상황을 몸으로 익힐 수 있었다.
전우들이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며 말로 표현조차 할 수 없는 공포심을 느꼈다. 또 부상자들이 고통을 못 이겨 몸부림치는
모습에서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절망감을 느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내 운명이 한스러웠다. 삶의 의욕을 모두 잃은 공허한 심리상태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다음 작전을 위하여 국도를 따라 경주로 가게 됐다. 가는 도중 좌측 고지에 있는 인민군을 발견했다. 공격
명령이 하달되었다. 고지를 향하여 총을 쏘며 공격을 해 올라갔다. 돌격 지점쯤에 이르렀을 때 내 총열에서 탄피가 빠지지 않아 실탄이 장전 되지
않았다.
적탄은 미친 듯이 날아왔다.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M-1 소총이 실탄장전이 되지 않아 제구실을 못하였다.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나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다. 우선 살기 위해서는 생명의 파트너인 M-1소총의 탄피를 빼내는 것이 제일 급한 일이었다.
앞에 조그마한 바위를 방패삼아 적탄을 피하며 총에 남아있는 총알을 빼내고 노리쇠를 앞뒤로 작동시켜 보았으나 탄피가 빠지지
않았다. 나무 꼬챙이로 후벼도 보고 총을 세워서 땅바닥에 내리쳐 보았으나 탄피는 빠지지 않았다.
그때 “돌격 하지 않고 뭣하고
있어” 하는 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총소리가 울렸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한 장교가 권총을 손에 들고 나를 겨누고 있었다. 그 장교가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을 내려 총 공격을 하고 있는 중에 바위 밑에서 웅크리고 있는 나를 본 것 같다. 나는 너무 겁이 났다. 돌격 명령을 어긴
이탈자로 보고 나를 쏜 듯 했다. 그런데 죽지 않을 운명이었는지 총알이 빗나가서 총살을 면한 것 같았다.
해는 져서 어둠이 막
깔려오는 때였는데 눈에 불이 번쩍했고 권총 소리 때문에 귀가 얼얼해서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당시 내가 겁을 먹은 이유는 분대장 이상
상급자는 수하 병사들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즉결 처분을 한다는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무 겁이 나서 탄피도 빼지
못하고 고지로 뛰어 올라 갔다. 전우들은 벌써 고지를 점령하고 달아나는 적을 향하여 사격을 하고 있었다.
▲ 개성시내 위치한 민속관 내에 전시되어 있는 북한 선전물중 하나 입니다. 6.25 당시 한 고지 전투 전투에
나서는 북한군인들이 결의를 다지는 모습입니다. ©
추광규 | |
나는 우선 분대장에게
탄피를 빼달라고 했다. 어이가 없는지 분대장은 째려보며 꽂을대로 탄피를 빼주면서 화가 난 목소리로 “총수입을 잘해” 하였다. 그러나 총수입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다. 총을 쏘는 방법만 간단하게 배우고 최전선에 투입되어 한 달도 채 안 된 시점이었다.
17세의 소년 학도병으로 밥 낮 없는 전투에 총을 쏠 줄만 알았지 총을 조작하는 방법은 지금까지 배우지 못하였으니 군대로 보면 아주 무식한 한
소년병이었던 것이다.
다음날 비가 억수 같이 내렸다. 우린 다음 전투를 하기 위하여 앞산으로 진격했다. 산에 오르니 산 밑에 많은
인민군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 목격 되었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모든 화력을 총 동원하여 집중사격을 개시했다. 옆에 있던 한 장교가 나에게 총을
달라고 했다.
그 장교가 내가 준 총으로 적을 향하여 조준을 하더니 “이런 총을 가지고 실탄만 소비하느냐”하였다. 나는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대장이 “너 가늠쇠를 어떻게 했어” 한다. 나는 그때서야 내총에 가늠쇠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제 탄피를 빼기위하여 총을 땅 바닥에 내려 쳤을 때 빠졌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분대장이 “너 사고뭉치구나” 하였다. 그는 “할
수 없다!”하며 “총을 쏘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까 그냥 가지고 있어” 하였다. 나는 이렇게 멍청한 소년병 이었다.
기습사격을 받은
적군은 산모퉁이를 돌아 황급히 달아났다. 지휘관은 추격 명령을 내렸다. 산을 내려가며 추격했으나 인민군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런 저런 실무경험으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전투 경험을 쌓아갔다. 한 인간으로는 너무나 가혹한 실전 경험 이었다.
열일곱 소년병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겨운 시간 이었다. 나는 자신의 존재조차 잊고 살아가는 생명체에 불과했다.
<안양뉴스>에도 실렸습니다.
|
<ⓒ참좋은인연신문사 &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