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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말이는 상인군인들...'여탕' 엿보다가

2013.06.02 | 김인환



[한국전쟁참전수기] 나무 베어 돈벌이하다 산 주인과 '티격태격' 하기도

 

1950년 9월말경 제15육군병원에 입원한지 약 열흘 가량 되었을 때 난 퇴원 심사를 받았다.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는데도 상태가 양호하다며 퇴원 하라고 했다. 퇴원 심사 직후에 난 대구 보충대로 난 거처를 옮기게 됐다.

보충대는 이른바 ‘가다 꾸라’라는 실을 뽑는 공장이었다. 이곳에서 난 상처가 다 낫지 않아서 계속 절룩거리며 다녔다. 이 보충대라는 곳은 우리들을 먹이고 재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우선 식사가 제대로 제공 되지 않았다. 몇 끼를 굶고 나니 배가 너무 고팠다. 다리가 아픈 탓에, 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굶을 수밖에 없었다. 배식을 받을 때 앞줄에 서려면 달음박질을 쳐야 하는데 난 그럴 수 없어 늘 뒤로 밀렸다. 밥은 늘 모자랐다. 배식하다가 밥이 떨어지면 뒷줄에 있던 사람은 굶어야 했다.


▲ 6.25 당시 운영된 미군 야전 병원




밥은 공장에서 쓰던 작은 나무통에 받아먹었다. 밥을 지을 때 솥뚜껑을 열고 익지도 않은 설익은 밥을 퍼서 달아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건장한 병사가 몽둥이를 들고 밥솥을 지켜가며 밥을 지었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밥을 훔쳐 먹겠는가? 비극이었다. 사람이 너무 굶으면 자기가 한 행동이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것 같다. 군기라는 것은 찾아 볼 수 없었다.

10월 이라 밤에는 꽤 추웠다. 잠을 잘 때는 공장 시멘트 바닥에 가마니를 몇 장은 깔고 몇 장은 덥고 잤다. 가마니에는 쥐벼룩이 득실거렸다. 가려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너무 긁어서 피부에 상처가 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추워서 가마니를 덥고 잘 수밖에 없었다. 오그리고 자는 듯 마는 듯이 밤을 샜다. 난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은 상태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픈 다리는 더 아프고 몸은 더욱 지쳤다.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팠다. 전우 4명과 같이 보충대를 나섰다. 먹을 것을 찾아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담장 밖으로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그것을 먹으려고 몇 개를 땄다. 그 집 안에서 “누가 남의 감을 따느냐” 소리치며 주인아주머니가 뛰어 나왔다. 우리는 “군인인데 배가 고파서 먹으려고 몇 개 땄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하고 정중히 사과를 했다.

그 아주머니는 우리들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안으로 들어오시오 하였다. 아주머니의 나이는 마흔 즈음으로 보였다. 아주머니의 안내를 받아 처마 끝 쪽에 있는 들마루에 앉았다. 아주머니는 마당에 가꾸어져 있는 나물을 뜯어서 우리들에게 줄 음식을 급히 만들었다.

꽁보리밥이었다. 반찬은 고추장과 된장 그리고 버무린 채소였다. “지금 보리 밥 뿐이고 반찬도 없습니다. 이거라도 드세요” 하였다. 우리는 그 보리밥을 된장과 고추장에 비벼서 맛있게 먹었다. 오랜만에 배 불리 먹으니 살 것 같았다. 우리는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하고 그 집을 나왔다. 다시 뒤 돌아 보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아주머니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참 고마운 아주머니였다.

나는 탈영을 할 목적으로 전우들과 헤어졌다. 이모가 살고 있는 달성동을 향하여 무조건 걸었다. 이모네 집이 달성동이라는 것만 알았지 가본 적도 없고 주소도 몰랐다.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한다는 것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상처 난 다리는 점점 더 아파 왔다. 절룩거리며 달성 공원 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그때 지나가던 지프차가 내 옆에 섰다. 장교로 보이는 사람이 “보충대로 빨리 돌아 가”라고 하였다. 내 꼴을 보고 보충병이라는 것을 안 것 같았다. 나는 보충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이차를 타” 하기에 그 차를 타고 보충대로 돌아갔다. 나는 탈영 할 팔자도 못되었던 것이다.

보충대에 들어서니 마침 신체검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대구 제1육군병원에 입원판정을 받았다. 병동은 제7병동으로 임시로 사용하는 계성고등학교였다. 이모네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짐작되었다. 나는 입원하고 있댜는 사실을 집에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 즈음에, 국군은 적의 저항도 별로 받지 않고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하여 진격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당시 난 상처가 점점 아물어가고 있었다.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서 학교에 돌아갈 꿈을 꾸며 희망에 차 있었다.





입원한지 약일주일 후에 난 다시 재검진을 받았다.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며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라는 판정을 받아 부산 동래온천에 있는 육군정양원으로 입원하게 됐다. 인솔 병을 따라 부산진역에 도착하니 캄캄한 밤이었다.

전차를 타기 위하여 어두컴컴한 역 광장을 걸어가다가, 나는 그만 뚜껑이 없는 맨홀에 한발이 빠져 정강이를 다치고 말았다. 얼마나 아픈지 걸을 수 가 없었다. 전우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전차에 올랐다. 정강이뼈가 보일 정도로 큰 상처였다.

육군 정양원은 일제 때 지은 온천장 호텔이었다. 난 2층 다다미방에 배치되었다. 7명이 입원해 있었다. 실장은 이등상사였다. 입실자중에서 내가 제일 졸병이었다. 난 그때까지 군번도 받지 못한 비 군인 무등 병이었다. 육군 정양원에 입원해 있는 장병들은 거의 전상 장애자들이었다. 밤에 잠을 잘 때 꽤나 추웠다. 지하실 목욕탕은 추위를 피해 내려온 장병들로 항상 붐비었다.

난로를 설치 해 주었다. 석유난로였다. 좁은 방에 난로를 설치하니 더욱 잠자리는 좁아졌다. 석유를 지급 해 주는데 그 양이 너무 적어 밤에만 피워도 모자랐다. 우리는 석유대신 나무를 때기로 하였다. 난로에 붙어 있는 석유버너를 떼어내고 나무로 땔 준비를 하였다.

실장의 인솔 하에 톱과 도끼를 빌려와서 나무하러 뒷산에 올라갔다. 참나무 한 그루를 베어 장작을 만들어왔다. 우리 방 창문 넘어 이웃집 지붕에 쌓아 놓았다. 장작으로 불을 피우니 방이 따뜻해서 모두가 좋아했다.

실장이 자면서 발바닥을 난로에 데어서 화상을 입기도 했다. 벌겋게 부풀어 오른 발바닥이 보기에 흉측했다. 그러나 실장은 아무 감각도 없다며 아픈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좁은 방에 많은 사람이 기거를 하니 이런 사고도 났다.

추위는 해결했지만 배고픔은 해결할 수 없었다. 한 전우가 묘안을 냈다. 장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서 먹자고 했다. 시장 상인에게 장작을 사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얼마든지 사겠다고 하였다. 우린 산에서 장작을 해 와서 상인에게 팔았다. 그 돈으로 떡을 사와서 떡 파티를 열어 배고픔을 면할 수 있었다. 수시로 장작을 해 와서 일부는 땔감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팔아서 먹을 것을 사먹었다.

창문 넘어 이웃집은 공중목욕탕이었다. 지붕에는 환기통이 있었다. 이 환기통으로 밑을 내려다보면 여자들이 목욕하는 모습이 보였다. 호기심에 환기통으로 엿 보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 때문에 지붕 기와장이 깨지기도 하였다.

어느 날 목욕탕 집 주인이 찾아왔다. 기와장이 깨져서 비가 샌다고 항의하였다. 우리가 기거하고 있는 집 주인도 제발 사고가 나지 않게 해 달라고 우리에게 사정을 하였다. 정말 못 말리는 상이 군인들이었다. 실장이 앞으로 주의 하겠다고 사과를 했다. 민간인 시설에 군대가 주둔하게 되니 자연 민폐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옆방에 입원해 있는 고향 선배인 김 씨를 만났다. 무척 반가웠다. 김 씨는 나보다 5~6살 정도 더 많았다. 나를 보고 “고생이 많구나. 다친 데는 어떠냐고” 물었다. 난 ‘이제 많이 나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이 전쟁 통에 죽지 않고 그만하길 다행” 이라며 “전쟁이 곧 끝날 것 같으니 힘을 내라”고 했다.

그 형은 자기 집에 연락이 되어 가족들이 면회를 온다고 말했다. 며칠 후 김 씨의 형이 면회를 왔다면서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그 어른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 어른들은 “아직 나이어린데 고생이 많구나.” 하면서 나를 감싸 안아 주었다.

“우리 집안은 별 피해가 없고 모두 편안 하다. 이 전쟁으로 모두가 고생이 많구나!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고 하셨다. “배고프지?” 하면서 싸 가지고온 음식을 앞에 내놓으며 먹으라고 하였다. 나는 오래 간만에 고향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 그 어른은 내 소식을 우리 집에 전해 주겠다고 하였다.

며칠 후에 형님께서 면회를 오셨다. 집에서 내 소식을 듣고 한편 기쁘기도 했으며 한편 걱정도 되었다고 한다. 살아있다는 소식에 기뻤으며 병원에 있다고 하니 장애인이 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같이 오시겠다고 떼를 써셔서 만류 하였다고 한다.

난 형님이 집에서 가지고온 음식을 병실의 전우들과 같이 나누어 먹었다. 난 형님과 이웃 여관에 같이 하룻밤 자면서 고향 소식을 들었다. 형님은 이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고 하니 그러면 곧 학교에 복학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시며 가벼운 마음으로 가시었다. 형님이 꽤 많은 돈을 주고 가셨다. 돈이 수중에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였다.

어느 날 산에서 나무를 베고 있는데 산주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나무를 벤다고 노발대발 하였다. 실장이 “우리는 상이군인인데 날씨가 추워서 땔감으로 몇 그루 베었으니 이해를 해주시오” 하였다. 그 산주는 대뜸 ‘헌병대에 고발 하겠다’고 하였다.

실장이 그 말에 화가 나서 “고발 할 테면 고발하시오, 우린 전투 중에 다쳐서 추우면 상처가 더욱 아파 땔감으로 나무 몇 그루 베었을 뿐인데 사람보다 나무가 더 중요 하냐”며 대들었다. 그리고 “당신들이 누구 때문에 편히 잠을 잘 수 있는 줄 아느냐”며 언성을 높였다.

산주라는 사람은 기가 죽어 말없이 내려갔다. 이 전쟁에 가족이 죽고 다쳐서 슬퍼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기 산에 나무 몇 그루 없어진 것이 아까워서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에 씁쓸했다.





잠시 후에 헌병이 올라왔다. 상이군인 들이 산에 나무를 마구 베어 간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했다고 하였다. 실장이 “우리는 부상을 입어 불구자가 되어 밤에 추워서 땔감으로 나무 몇 그루 베었다. 이것이 큰 죄라면 달게 받겠으니 나를 잡아 가시오” 하였다. 그 헌병은 이해는 하는데 민원이 발생 하지 않도록 해 주시오 하고 돌아갔다. 그 후에도 땔감 작업은 계속 되었다.

1950년 말이 가까워지며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UN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슬픈 소식 이었다. 신문과 방송은 보고 들을 수 없었고 그 누구도 자세한 전항을 알려 주지도 않았다. 다만 지나가는 말로만 듣고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1월 1일 퇴원 명령을 받았다. 겨울인데도 내의를 지급 받지 못하였다. 추위에 떨며 집결지인 부산진역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겨울 복장으로 내의 군복 미국제 오버코트 양말 군화 등을 지급 받았다. 다시 전선에 투입 될 준비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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