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다닥 1박2일...행복을 담고있는 불일암, 인심 좋은 여수댁 새벽, 잠에서 깨니 ‘토도독’... 비 소리다. 그 소리가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잠시 귀 기울여 본다. 법정스님은 입적하시기 전 ‘내
이야기가 더 듣고 싶으면 자연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라.’ 하지 않으셨나. 떠나 보자.
가야 할 곳이 어떤 곳인지 자세히 찾아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었다. 다행히 남편이 내 마음을 알아줘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5월 10일 어둠이
벗겨지고 있는 고속도로에 올랐다. 보슬비가 길 떠나는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연둣빛 나뭇잎이 얼마나 풋풋하고 싱그러운지 콧노래가 흥얼흥얼
난다. ‘초등학교 때 배운 노래부터 시작해 뽕짝까지 하면 대전은 가려나’하며 깔깔 웃는다.
전라남도 순천까지는, 쉬엄쉬엄
가면 자동차로 네 시간 반 정도 걸린다. 휴게소에서 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다양한 사람을 볼 수 있어서다.
아침 일찍
떠났는지 관광버스에서 아줌마들이 우르르 내렸다. 서로 먼저 가려고 화장실로 돌진하고 있다. 한 손은 바지를 움켜잡고 다른 한손은 냅다 휘두른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바라보다 휘두르는 손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녀들을 보는 것은 정말
즐겁다.
드디어, 전남 순천에 위치한 송광사 사인이 보인다. 비도 그쳤다. 비개인 산사는 더없이 맑고 청명하다. 먼저 불일암에
오르기로 했다.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송광사 입구까지 가지 않고 중간 정도에서 오솔길로 20여분 올라가면 되었다. 불일암에
오르는 길은 고요할 정도로 한적하다. 걸으면서 ‘좋다, 정말 좋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조금
가파른 흙길을 오르고 나면 울창한 나무숲이 나타난다. 울창한 숲길이 끝난다 싶으면 대나무 숲이 이어진다. 숲 사이사이로 비쳐지는 햇빛에
‘아’하는 감탄사가 나도 모르게 나온다. 돌계단 길, 흙 속에 나뭇가지를 툭툭 박아놓은 길도 원래부터 있었듯 자연과 하나가 되어있다.
어느새 정갈하고 자그마한 암자가 보인다. 꼭 한 번 와보고 싶었던 불일암이다. 이곳은 법정스님이 17년간 머무르셨던 곳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서 있으니 이곳을 오르며 보았던 법정스님의 글이 떠오른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후박나무, 검정 고무신, 스님이 직접 만드셨다는 나무로 만든 ‘빠삐용의자’가 포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것’ 생각만 해도 홀가분하고 편한 일인데, 나는 실천하기가 어찌 그리 어려운지. 스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세상 잡다한 일들을 모두 털어낸 듯 잔잔한 행복이 밀려온다.
송광사를 돌아 본
후 40km 떨어진 순천 자연생태공원으로 향했다. 5월의 갈대숲이 환상적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멋진 풍경이 있다니 놀랍다. 나는 갈대하면 가을
갈대만 떠올렸고, 드넓은 갈대밭은 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걸로 알았었다. 확 트인 파란 하늘, 연초록 갈대, 나무로 만든 산책길, 이러한
이국적인 풍경에 ‘이곳이 전남 순천일까’ 싶다.
바람에 살짝 고갯짓을 하는 갈대를 보니 마음이 괜스레 설렌다. 남편이 손을 꼭
잡는다. 간만에 연인이 된 기분이다. 갈대 사이로 게가 엄청나게 꼬물꼬물 거린다. 갯벌에 수만 마리가 있는듯하다. 신기하다.
‘엄마, 엄마, 저 게 좀 봐요’ ‘와우!’하는 구경 온 아이들의 환호에 나도 덩달아 신바람이 난다. 이 멋진 곳을 여태 왜 와 보지 못했었나
싶다.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이 듬뿍 솟는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여수 향일암으로 향했다. 바다를 끼고 올라가는 길은 정말
아름답다. 잔잔한 코발트 빛 바다와 하늘, 초록나무들의 어우러짐을 보며 가슴이 뻥 뚫림을 느낀다.
향일암으로 가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노라니 숨이 가쁘기만 하다. 심장이 헉헉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몸은 점점 가벼워진다. 정성스런 스님들의 기도 소리가 넓은
바다에 울려 퍼진다. 비우고, 비우고 그 속에 새로운 기운이 스며든다.
순천, 여수 지역에 새로 만든 도로에 입이 떡 벌어진다.
자동차는 많이 보이지 않는데 여기저기가 모두 길이다. 바다를 잇는 다리도 많다. 거북선 대교. 이순신 대교 아름답긴 한데 우리 밖에 없어 대교를
독차지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 대교를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수고와 비용이 들었을까! 그것을 어찌 감당할지 오지랖 넓게도 걱정이
된다.
여수 특산물 갓김치를 먹어 보아야겠다 싶어 동네 분에게 물었더니 간판도 없는 곳을 가르쳐주었다. 물어물어 간 집 주인이
“밥을 새로 했으니 먹고 가. 호끈호끈한 밥에 김치 쭉쭉 찢어 먹음 맛낭께.” 한다. 예순이 넘어 보이는 그녀의 말투, 걸쭉한 사투리에 정이
듬뿍 묻어 있다. 난 줄래줄래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어수선하긴 했지만 아침을 건너 뛴 터라 몹시 배가 고팠다. 염치
불구하고 먹기로 했다. 금방 한 흰 쌀밥과 갓김치, 생선을 넣고 끓인 미역국을 내놓았다. 밥은 얼마든지 있으니 많이 먹으란다. 난 땀까지 흘리며
맛있게 먹었다.
“여수는 공기 좋재, 물 맑재, 사람들 인심 좋재, 우리나라에서 여수만큼 좋은 곳이 어디 있간디?” 구수한 입담으로
여수 자랑도 잊지 않았다. 서울 갈 때 먹으라며 직접 쑥을 캐서 만든 쑥떡까지 한 봉지 싸준다.
“이 손 험하재? 그래도 고맙지, 이 손으로 갓 심고 키워 김치 담아 아이들 공부
시켰어.”
이 말을 듣고 그녀의 손을 보니 정말 험하다. 손톱은 뭉개어져 있고, 손바닥은 툭툭 갈라져있었다. 순간
퉁실퉁실한 내 손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밥값을 드렸더니 벌컥 화를 냈다. “내가 주고 싶어 준 건디 이런 법은 없지라.” 한다. 오랜만에 겪는
상황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아직도 이런 정이 남아있다는 것에 무척 흥분되었다.
남해 보리암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길. 그녀가 싸준
정이 듬뿍 담긴 쑥떡을 오물오물 씹으며, ‘떠나면 좋다. 그냥 좋다. 여행 도중에 만나는 사람이 좋고 그 곳에 산과 바다가 있어 좋다.’ 고
되뇌인다. 산 저편에 연무가 피어오른다.
<안양뉴스>에도 실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