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1월 18일 금요일 성도재일 큰스님 법문
예 모두 반갑습니다.
예 오늘이 부처님께서 크게 깨달음을 일으켰다는 성도재일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이라
하면 많은 이미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깨달음을 가장 먼저 생각합니다.
부처님 일생에 있어서 크게 중요했던 날이 바로 성도의 날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래서 부처님 4대명절을 애기한다면 부처님 오신날 4월 초파일이요.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 드디어 출가하신날 출가재일 그게 언제죠 음력 2월 8일 음력 2월 8일 그때가 연세가 어떻게 되죠 스물아홉 부처님께서 성도하신날 삼십오세 오늘 12월8일 음력 12월을 납월이라고 말합니다. 납월 8일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세 번째 기념일이고 네 번째 기념일은 부처님께서 이 육신의 몸을 훌훌 털어 없애버린날 그날이 열반재일이죠 열반일 그것이 부처님 연세 팔십에 며칠이었죠 이월십오일이었죠 부처님 일생을 두고 봤을 때
4대재일 있다 말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념일이 성도재일이다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셨다라고 하는 도의 개념과 즉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셨다고 했을때
깨달음의 개념하고 다른 일반 뭇 중생들의 깨달음 도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는 늘 이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하면서 많은 불자들이 부담을 지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일례를 들면 야! 니 절에 그리 오래 다녔으면 깨달은 것이 있느냐? 깨달았느냐라고 또 이렇게 묻는다면 막상 또 내가 부처님경지까지 가지 못했으니까 큰소리 못치죠 할 말 없죠. 또 스님한테도 더러 신도들이 스님은 수십년 수행했으면서 또는 선방에 3년 6년 10년
이렇게 다녔다면 깨달은 것이 있지 않느냐 부처님처럼 깨달았느냐 이렇게 묻는다면 그 또한 할 말없는 것이고요 그리고 또 일례로 또 절에 좀 가자 이렇게 얘기한다거나 스님들이 신도들상대로 뭘 얘기한다면 비아냥대는 사람들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은 그럼 지는 다 깨달았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하느냐고 그러면 너는 깨달았느냐 깨닫지도 못했으면서도 뭐 그리 큰소리치느냐 이렇게 또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 소리 들으면 신도가 되었던간에 스님들이 되었던간에 맞어 나는 깨닫지도 못했는데 뭐 이렇게 잘난척하고
큰소리를 치고 법문을 한답시고 할 만한 사람인가 자격지심이 일어난다는 거죠 음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그러한 환경 그러한 어떠한 한계에 부딪히고 있지 않은가 누가 니 그럼 절에 다닌다면은 그럼 뭐 깨닫는
것이 있느냐고 부처님처럼 깨닫는 바가 있어서 니가 절에 가자고 하느냐 니가 뭐 알길래 니가 불교에 대해서
이야기 하느냐고 그렇게 말한다면 정작 본인은 할말이 있는가 말이죠 그런데 그 말이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얘길하고 그 얘길 듣는 불자나 스님들은 그 함정에 걸려서 기가 죽어서 말도 못하고 그렇지 내가 깨닫지도
못해서면서 너무 잘난체 하는 것이 아닌가 포교에 대한 열의 정법에 대한 열의를 스스로 꺽는 일이 없지 않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라 하는 것도 단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장에 우리가 금강경이라고 하는 경에서도 보면 금강경은 그 정신적인 높은 경지를 4단계로 나누고 있지 않느냐 이거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그러잖아요. 금강경은 대충 4단계로 나누었지만 이 화엄경이라고 하는 경에서는 전체를 52계위로 나누고 있어요. 52단계로 나누고 있지 않느냐 이거야 그래서 십신 십주 십회향 그다음 뭐죠 다시 봐봐요 십신 십주 십회향 십주 다시 한번 해봐요. 십신 십주 십회향 그다음 뭐죠 음 그 참 어렵네요. 십신
십주 십회향 십지 그러네요. 이따 다시 얘기 해봐요. 열가지 믿음 십신 십주 십회향 십지 하나가 중간에 빠졌네요.
그래서 어쨌던간에 50단계 등각 묘각 52단계라 아무던 52단계라 그런데 이 52단계 52계위라 이렇게 말하는데
52계위 중에서 나는 첫단계 신심은 일으켰어 십신중에서 첫 번째 단계가 신심이라는 단계라 일단계 일단계 들어가는 깨달음의 단계가 신심의 단계죠. 그런데 열가지 믿음의 단계 첫 번째 신심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단계 묘각의
단계까지가 쉰두등분이라, 쉰두등분이라 나는 이미 믿음을 가지고 불문에 들어왔기 때문에 첫 번째 단계는 들어온 거라 내가 부처님처럼 묘각의 단계까지는 올라가지 못했어. 묘각의 단계까지는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그렇지만
내가 어느 단계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단계의 깨달음에는 들어서있다. 들어가 있다. 이말이거든 그렇다면은 내가 무슨 말을 누구한테 전한다. 내가 누굴 위해서 법문을 한다. 이랬을 경우에 그 법문이 부처님처럼 완벽하고 부처님처럼 참 최상이고 한것은 아니지만은 내역시 내가 깨달은 분상 내가 알고 있는 그 한도안에서 내가 충분히 얘기할 수 있다 이말이요. 그렇다면은 누가 니 그러면 깨달은 바가 있느냐 이르면 그래 난 내대로 깨달은 바가 있다 이렇게 말해버리면 되는 거요. 자신 없는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는 거죠 음 그거 다시 얘기해봐요.
아까 그거 예 십신 십주 십행 그렇지 십행이 빠졌네. 삽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그러면 열 개씩이니까 오십개잖아요. 여기에다가 등각이 오십일 묘각이 오십이단계라 아 이해가 되시죠 그래서 대구큰 절 옥상에 모셔저 있는 황금미륵대불이 전부 오십이척이라 한척이 삼십센티미터이거든요. 그러니까 15미터잖아요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52등분의 깨달음의 세계를 쭉 나열하고 있는데 나는 이미 신심의 단계는 들어왔다 이말이요. 일단계는 신심이거든요
그러니깐 십신 십주 십행 쭉 지나가는데 십신의 첫 번째 단계 십신의 첫 번째 단계가 신심이라 그러면 나는 누구를 위해서 불교를 전파하고 누구를 위해서 설법을 한다면은 이미 나는 믿음의 단계는 들어오지 않았나 이거라 그러면 나는 충분히 내 분상에서는 충분히 설법을 할 수 있고 내 분상에서는 충분히 누구를 위해서 전도를 할 수 있고
포교를 할 수 있는 내 나름대로 자격이 있다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해야 돼요 말하거든요. 처음에 전자에 얘기했듯이 니 깨달은 것이 있어가지고 니가 얘기하느냐 그러면 부처님처럼 깨달았느냐 부처님처럼 깨달았다하면
최상의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지 우리가 그러면 어디 좋은 대학에 갔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러면 수학을 예로 든다면 수학을 그러면 지가 완전히 100점 완전히 100점 다 맞아서 그 대학에 가느냐 그거는 아니거든 그게요. 그러잖아요. 그리고 또 대학에 간다는 것도 뭐 아주 일류대학도 있지만 그 이외에 밑에 또 자기 적성에 따라서 성격에 따라 갈수 있는 대학도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 이거야 그 내가 수학성적이 뭐
70점 70점 80점 80점 똑같이 공부를 했기 때문에 0점이라는 것은 거의 없거든요. 그러면 자기가 또 40점짜리 수학학생이다 50점짜리 수학을 하는 학생이다 그러면은 자기가 고등학교 수학을 했다 이러면 5~60점 수학생 수학을 하는 학생이라 할지라도 저 아래 초등학교 1학년 초등학교 2학년 초등학교 3학년의 수학 산수는 가르칠만한 힘은 있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니는 그러면 수학을 100점 다 고등학교 수학을 완전히 마스터해가지고 니 그러면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을 가르치느냐 그렇게 묻는 것하고 똑같은 질문이라 니는 그러면 부처님처럼 다 깨달아 가지고 가르치느냐 이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의 물음이 그와 같이 어리석은 물음이다 이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걸 역설적으로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그런 깨달음의 위치 깨달음의 영역은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게 이미 불교입문에 들어왔다면 52단계 중에서 자기는 어느 부분엔가는 가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누구나 다 깨어있기는 깨어있다 누구나 다 깨달아 있되 깨달음이 좀 더 훌륭한 사람이 있고 조금 아직은 그 깨달음이 단계로 말했을 때 좀 낮은 단계에 있는 사람이 있다. 있긴 다 있다 이 말입니다.
예 불교를 여러 측면에서 얘길할 수 있는데 제가 이미 이번 올해 나온 불교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포교 책자 속에 넣어놨습니다. 뭐냐 하면 무일 우학스님의 불교 6대 요약이라해서 이것이 불교다 불교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불교 에너지는 무엇인가 그 속에 제가 쭉 넣어놨습니다. 첫째 불교의 이념은 무엇인가 열반이다. 열반은 뭐냐 최상의 행복이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불교의 사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연기사상이다. 연기라는 것이 뭐냐 인연의 소중함이요 인연의 아름다움이다 그런 얘기를 했지 않았나요. 그다음에 세 번째는 불교정신이라 했잖아요. 불교정신이 뭐냐 자비정신이다. 자비정신은 도대체 뭐냐 초월적 사랑이다. 네 번째는 불교의 목적이 도대체 뭐냐 불교의 목적은 해탈이다. 해탈이라는 것은 요즘 우리말로 하면 뭐냐 그건 바로 대자유의 구가다 그랬잖아요.
그 다음에 이제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깨달음 깨달음의 문제인데 바로 깨달음의 문제는 불교주의에 해당합니다. 불교주의 불교주의를 내 나름대로 각성이라 정의했어요. 각성이라 성품을 깨닫는다는 거지요. 우리가 주의라고 하면 상대되는 두 개념을 가지고 선택적 측면으로 얘기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예를 들면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와 같이 종교 속에서 말할 때에는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 이렇게
또 말할 때도 있어요. 신을 본의로 하느냐 인간을 본의로 하느냐 그 말이잖아요. 그런데 불교는 다 감을 잡으시겠지만 신본주의는 말도 안 되는 것이고 신이 인간을 창조했고 신이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다. 그것은 뭐 엉터리 중에
엉터리이고 또 인본주의다 사람중심이다 이러면 그럼 우리가 방생할 이유도 없고 사람중심으로 자연을 마구 훼손해도 할 말이 없는 거죠 불교는 그게 아니거든요 예 그래서 불교는 인본주의도 아닙니다. 더 차원이 있어요. 더 차원 높은 얘기 그게 뭐냐 각성주의라 한다. 각성주의 모두 한번 따라 해보세요.
각성주의 각성주의 예 각성주의 신본주의도 아니고 인본주의도 아닌 입장이기 때문에 중도적인 주의다 각성주의는 중도적 주의다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중도주의 각성주의 성품을 깨닫는 주의다. 그래서 나는 현재 지금 어디에 처하고 있는가 이 뜻을 잘 스스로 간파한다면 그 또한 자체가 깨달음이라 그러니까 누구나 다
깨닫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누구나 다 깨달음에 처해 있는거라 깨닫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까 말했잖아요. 52계단 중에서 어느 단계에서든 자기는 어느 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거지요 문제는 내가 지금 어느 쯤에 있으며 항상 깨어있는가 이것을 이제 스스로에게 반문을 할 필요가 있는거지요. 그래서 사람의 크기는 깨달음의 크기와 맞먹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행위나 그 사람이 하는 생각은 그 사람의 깨달음의 크기와
비례한다. 깨달음의 크기만큼 그 사람은 인생을 살아간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부처님처럼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은 완전한 삶을 사실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불자로서 그만큼은 못되지만은 내가 불교를 하고 불교 수행을 했다면 꼭 깨달음의 크기가 있을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살아가는 거지요. 그만큼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지요 이것을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짐승이나 식물도 역시 다 자기 분수만큼 깨달아있다 이렇게 봐도 틀림이 없어요. 식물은 식물의 크기만큼 깨달아 있는거요. 축생은 축생의 크기만큼 깨달아 있는거라 축생의 종류 안에서도 아주 기어다니는 아주 작은 벌레는 작은 벌fp만큼 깨달아 있는 것이고 덩치가 크고 지혜가 좀 더 나은 그런 축생들은 그만큼 좀 더 깨달아 있는 것이지요. 그 위에 인간은 다른 동물하고는 참 대비되는 그런 크기가 있다 이 말입니다.
예 그래서 인간은 인간만큼 깨달아있는 거지요. 문제는 누구 어떤 존재든지간에 다 깨달아있다라고 하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서 일체 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 이렇게 말해요. 일체중생이 다 부처님 성품이 있다. 부처님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이 이 때 부처님의 성품은 깨달음의 성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성질 잘 생각해보셔야되요. 불성 깨달음의 성품 우리가 부다라고 할 때 붓다라고 할 때 buddha라 이렇게 쓰거든요 BUD 우리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의 영어이니셜이 BUD죠 이 BUD라는 요 개념은 그 속에는 깨달음 깨닫다는 요런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BUD 부처님 불성 이속에는 깨달음이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들어가 있다 이 말입니다. 일체 모든 존재는 다 깨달음의 성품이 있고 이미 깨달아 있다 이 말이요. 그런데 그 깨달음의 정도가 다를 뿐이지 다 있다
음 모든 동식물에는 다 수분이라는 것이 있어요.
예를 들자면 물 기운이 있어요. 물 기운 모든 동식물에 수분이 있다하지만 수분이 있는 정도가 다르잖아요. 어떤 식물에는 물 기운이 많고 어떤 식물에는 물 기운이 거의 없는 그런 식물들이 있을 수 있겠죠. 그렇지만은 물 기운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어야돼 없으면 식물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야 그렇잖아요. 그것처럼 일체 존재가 다 불성이 있다했는데 불성이 있다라고 했을 때는 그 정도에 따라서 다를 뿐이지 부처님의 성품은 다 있다 이거요. 정도가 다를 뿐이지 그래서 일단은 우리가 전제해야 할 것이 모든 존재는 깨달음의 성질이 다 있다. 우리는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내 스스로 내가 그런 깨달음의 성질 불성존재라는 것을 늘 자각하고 항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해야한다.
두 번째는 거듭거듭 깨어나려고 애를 써야 된다 이 말입니다. 좀 더 높은 차원에서 깨어 있으려고 애를 써야 된다. 그러니까 아까 우리가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오십단계가 있고 그 위에 등각 묘각이 있다고 했잖아요. 근데 우리가 십신의 단계에서 십주의 단계로 올라가야되고 십주의 단계에서 또 십행의 단계로 십행의 단계에서 십회향의 단계로 십회향의 단계에서 십지의 단계로 이렇게 자꾸 점점 높은 단계로 깨달아 나아가는 그런 불자가 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거듭 깨어난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진하다가 정진하다보면 우리도 부처님처럼 어느덧 무상정등정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 확철대오의 그 자리에까지 올라가지 않느냐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부터 너무 많은 욕심을 내어가지고 나도 부처님처럼 아주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어서 그때 내가 포교를 하고 그때 가서 내 가족들을 위해 정법을 해야겠다. 이러한 생각은 현재 자기 수준이 너무 형편없고 힘든데 너무 많이 욕심을 내서 어찌보면 도저히 현재 상태에서 다다를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을 설정하고 너무 무리한 욕심을 내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지 말고 지금 자기 분상에서 열심히 수행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지금까지 알고 배우고 깨달은 그 내용까지 해서 이웃들에게도 법을 전파하고 포교하고 또 내일 가면 또 열심히 수행을 했기 때문에 좀 더 깨달았고 또 좀 더 불교대학에 와서 배운바가 있어서 좀 더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죠. 내일이 되면 그만큼 또 전달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겁니다. 부처님처럼 완전히 다 깨닫고 난 뒤에 전달하겠다. 이래한다면 부처님이외에는 아무도 할 말을 할 사람이 없는 겁니다. 말 할 사람이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불자로서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하면 말 그대로 늘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상구보리하면서 하화중생 늘 아래로는 이웃을 생각하고 이웃을 제도하겠다. 하화중생 하겠다는 이 생각이 같이 살아있어야 한다. 이겁니다.
오늘 이 성도재일을 맞이해서 오늘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우리는 이런 정신이 되어있어야 합니다. 내가 항상 깨어있어야 하고 거듭거듭 깨어나야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처럼 무상정등정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다 이룬 이 후에 내가 하겠다하는 생각은 버려야 된다 이거죠 제가 이미 요만큼이라도 법당에 와서 뭡니까 법당에 와서 지금 스님 법문을 들을 정도 되더라도 신심있잖아요. 요만큼 내가 와서 법문도 듣고 성도재일 법회에 동참해야지 라고 하는 요 자체가 바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자량이잖아요. 오늘 성도재일이다. 부처님께서 오늘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바로 기념하는 날이다. 만약 그런 생각조차도 없었다면 그 생각한 자체가 뭡니까 자각이잖아요. 자각 그러한 자각도 없었다면 이 자리에 오지도 못했어. 그렇다면 자기는 그만큼 깨닫고 있는 거잖아요. 그만큼 깨닫고 있다면 깨닫고 있는 자체가 이미 배우는 선지식들에 대한 빚이요. 부처님에 대한 빚입니다. 자기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간에 부처님에 대한 그만큼에 대한 깨달음이 있게 된거지요. 책을 통해서 있게됐든지 법문을 통해서 있게됐는지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를 통해서 있게됐던지 간에 어쨌던지간에 그만큼 자기가 깨달음에 대한 빚을 지고 있는 거라 지금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현장에 있다면 바로 자각 자체가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요. 자기가 깨달음에 대한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거든 그렇다면 이웃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만큼 포교를 하고 내가 느껴보고 좋은 만큼 권유를 해야 되거든요. 야 내가 그 잘난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한 번 가보자 기도가 잘 된다더라 기도 한 번 가보자 참선이 잘 된다하더라 참선도 한번 가보자 불교대학공부가 경전위주로 한다던데 니 거기가서 공부한번 해보자 니 절에 좀 다니다가 쉬고 있지않느냐 니 다시 재입학하자 끊임없이 이웃들에 대해서 깨달음의 소식을 전할려고 얘를 써야 된다. 이겁니다.
아무던 우리는 각성해야 합니다. 불교주의 각성주의다.
예 그리고 인제 불교 각성 즉 불교주의를 각성이라고 제가 정의를 내렸는데 성품을 깨닫는다 그래서 거듭 깨어나고 깨닫기 위해서 나와 있는 많은 수행이 있는데 그 중 수행중에서 사마타적 수행 위빠사나 수행 간화선수행 제가 주창하고 있는 선관쌍수 수행이 있다. 이런 말씀이죠. 사마타수행은 신묘장구대다라니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재 새바라야 이렇게 빠른 속도로 무아지경에 들어서 경전을 외우거나 다라니를 외우는 것을 사마타수행이라 이렇게 말해요 그것 아주 좋은 수행입니다. 위빠사나 수gpd은 자비관을 한다거나 또는 수식관을 한다거나 호흡관을 한다거나 한다면 좋은 관법의 수행입니다. 우리가 부처 님 전에 와서 절하고 기도 할 때도 부처님의 한량없는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상호를 늘 관하는 것이 좋아요 그것이 관법의 수행입니다. 위빠사나 수행 아주 좋은 수행입니다. 부처님을 찾아뵙는 것 그 자체가 위빠사나 수행이라 보통 우리는 아이구 뭐 절에 갈 것 뭐 있느냐 집에 앉아서도 얼마든지 불교 공부할 수 있고 예불드릴 수 있다. 맞는 말입니다. 예 그것은 아주 상근기의 얘기일 수 도 있고 말일뿐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하면 공부는 마음공부가 되어야 되는데 절에 한번 오는 자체가 마음을 다 잡는 일이 되거니와 두 번째는 절에 와서 부처님 상호 뵙고 부처님 이렇게 친견하는 자체가 관법의 수행입니다. 그 자체가 바로 내 마음이 확 정리가 되는 그런 시간이다 그 말입니다. 집에서 또는 사회에서 스트레스 받는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다. 그렇지만 절에 오면 그러한 스트레스나 여러 가지 정신적인 압박이 확 풀리게 되잖아요. 부처님을 뵘으로써 법당에 옴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집에 앉아서 뭐 컴퓨터로 공부를 하고 집에 앉아서 뭐 나는 법당까지 안가도 된다. 이렇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이거지요 법당에 모든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다 고려한다 하더라도 절에 와서 공부하고 절에 와서 참선하고 절에 와서 기도하는 것이 집에 앉아서 그냥 컴퓨터 인터넷 통해서 집에 앉아서 자기 혼자 하는 것하고는 차원자체가 다르다 이 말입니다. 아무던 절에 와서 자주 자주 부처님을 친견할 일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수행단계 세 번째는 간화선입니다. 다시 정리해드리면 사마타수행이 있고 위빠사나 수행이 있고 그 다음에 간화선수행이 세 번째 단계에 있습니다. 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 뭐꼬 하는 화두잖아요. 그런데 그 화두 위에 있는 것이 선관쌍수입니다 내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면서도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이게 바로 선관쌍수 수행이라는 겁니다. 이해가 되시죠 아무던 오늘 이렇게 오셨는데 제가 권유를 해드린다면 선관쌍수 수행을 꼭 해보시길 바라고 나는 뭐 아직도 큰 수행을 경험해 본 적도 없고 아직도 크게 체계를 세운 바가 없다면 오늘 다시 한 번 전혀 다른 조금 다이나믹한 수행방법을 제시하겠습니다. 제일단계는 뭐냐 하면 부처님께서 나에게 감로수 감로수라고 하면 온 세상의 지혜와 자비공덕의 물입니다. 자비공덕의 물을 내 정수리에 막 퍼붓고 있는 내리고 있는 그런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게 좋은 관법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감로수로 탐진치를 생명수로써 탐진치를 싹 씻어내고 그러면서 관세음보살의 미소를 닮아서 자기도 관세음보살의 미소를 짓고 있어야 되요 절을 할 때 관세음보살의 미소를 지으면서 한번 절할 때 감사하고 두 번째 절할 때 사랑하며 세 번째 절할 때 감사하며 네 번째 절할 때 사랑하며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앉아서 참선할 때 같으면 단전호흡을 하면서 숨이 들어갈 때 나갈 때 감사하고 사랑하며 감사하고 사랑하며를 끊임없이 반복해 가는 것이죠. 그러면서 나중에 수련이 잘되면 나중에는 야 내가 이렇게 호흡을 하고 있고 내가 지금 이렇게 관세음보살을 관하고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관하고 있는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도대체 뭔가 무엇이 관세음보살님을 관하고 있고 무엇이 지금 호흡관을 하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늘 애기하고 있는 선관쌍수이지 않느냐입니다.
오늘 이렇게 모이신 김에 이렇게 나온 김에 다부지게 수행을 해보시길 바라고요. 그리고 아까 제가 불교의 6대 특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다가 다섯 번째 말씀을 드리다가 했는데 여섯 번째는 불교의 이상이라는 것이 있어요. 불교는 무엇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가 불교정토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불교수행을 하는 것도 이 세상 이대로 내가 살고 있는 이세상이대로 부처님 나라로 한번 만들어보자 그게 바로 불국 정토라고 하는 이상을 꿈꾸는 있다는 겁니다.
어느 교수가 쓴 책을 보니까 불국토를 꿈꾸는 사람들 이라는 책이 있더라구요. 바로 우리의 이상은 언제나 불국토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정이 불국토가 되어야되고 내가 다니는 이 절이 불국토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점점점점 깨달아가는 깨달음의 차원이 좀 더 높아지는 불자 수행자가 되어야 된다 이거죠 우리는 그래도 정법도량을 만났잖아요. 엘리트불자라 엘리트불자 그리고 또 공부하니까 엘리트불자라 공부하지 않으면 엘리트불자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배우지 않으면 그 집단은 엘리트가 될 수 없어요. 불교가 이렇게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이렇게 다른 종교에 비해서 뒤쳐지 는 감이 없지 않느냐 그건 뭐 때문에 그러느냐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좀 더 차원이 더 높아지려면 무조건 불자들 배워야 됩니다. 배운 불자는 엘리트불자라 말합니다. 그래서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다니는 사람은 다 잘났다. 엘리트 불자 다 말하잖아요. 엘리트 불자답게 정법 수행해야 합니다. 수행해야 합니다. 정법대로 참선하고 정법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나혼자의 법락이 되지 않고 이것이 내 가정이면 가정 내가 처해 있는 사회면 사회 내가 다니고 있는 절이면 절 요것이 전체가 다 좋아지는 전체가 다 좋은 참좋은 공동체가 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참좋은 공동체 참좋은 세상을 불국정토라 합니다. 불교의 이상을 불국정토라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모든 수행이 다 불국정토를 구현하는데 다 쓰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불자들은 최종적인 이상적인 세계를 불국정토로 생각하고 정말 포교도 열심히 해야 되고 가정에 돌아가서는 가정생활 잘 해야 됩니다. 그러면 불교의 6대 요약 여기에 대해서 한 번 더 짚고 오늘 성도재일 법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불교의 이념 열반 최상의 행복
불교의 사상 연기사상 인연의 소중함
불교의 정신 자비정신 초월적 사랑
불교의 목적 해탈 대자유의 구가
불교주의 각성 깨어있음
불교이상 불국정토 참좋은 세상
아무던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되구요. 거듭거듭 깨어나는 불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불교의 6대 특징 다섯가지가 남았는데 이것은 후일에 초하루법문을 이용해서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오늘 철야기도에 오신 큰 보람 있으시길 바라구요. 아무던 나는 현재 어느 지점에 있던지 나는 내 나름대로 깨닫고 있고 더 높은 깨달음을 향해서 지금 내가 정진하고 있다는 여기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야 되요. 니 뭐 깨달았나 그래 내 분상에서 내 깨달은 바가 있다. 이렇게 자신있게 얘기하는 그런 불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관세음보살 |